‘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전체는 되는대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울집시가 살아가는 태도가 이 문장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자연과 우연, 운과 같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흐름에 맡기고, 대신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 무언가를 이뤄나가기에,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분기만을 남겨두고 있는 25년. 4분기에도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자 다짐하며.. 9월호 시작합니다.

2025 코끝에 여름 byebye

서울집시의 대표 여름 맥주 코끝에 여름. 코끝에 여름을 마시지 않고 지나가는 여름은 여름이 아닌데.. 코끝에 여름을 마시지 못한채 가을이 되어버렸습니다. 제피라는 잊혀져가던 한국의 재료를 사용하고 마시기 편하면서도 개성도 가득해, 서울집시가 추구하는 맥주의 정체성을 가장 잘 담은 맥주라고 생각해서 정말 애정하는 맥주인데요🌿 (전 세계에 어떤 맥주도 대체할 수 없는 맥주이기도 하구요!)

IMG_7306.JPG

모두가 비슷한 생각인지 코끝에 여름은 팬이 정말 많아서, 여름이 시작되면 많은 분들이 코끝에 여름 언제 나오냐 매장에서도 여쭤보시고 DM으로도 많이 연락주시곤 합니다. 톡 쏘는 제피의 시트러스와 알싸함과 그 뒤에 깔린 몰트의 은은한 아카시아 꿀 같은 향.. 여름 맥주답게 엄청난 음용성까지.. 기다려주신 분들이 많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2025년 코끝에 여름은 저희의 내부 퀄리티 기준을 맞추지 못해서 폐기되었습니다.

IMG_5025.HEIC.heic

코끝에 여름은 초여름에 단 2주간만 수확이 가능한 제피 원물을 이용합니다. 자연에서 오는 원물을 이용한다는건 매 년 작황과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기에 그만큼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선 자연의 행운(?)이 따라줘야 합니다.

올해는 여름이 너무 일찍 와버려서 농부님이 빠르게 더워지면서 제피도 너무 빨리 익어버렸다고 하셨는데요. 정말 받아보니 작년과 다르게 제피 자체에 억센 맛이 도드라졌습니다. 원물이 아쉬워서 불안감이 있어 억센 캐릭터를 다듬기 위해 발효 시간도 기존보다 더 오래 가져가며 양조적인 보완을 더해주어 완성했습니다. 다행히도 맥주는 나쁘지 않게 완성되었습니다.

EB719091-F5E7-4554-AFEE-3C9F655B1E93.JPG

하지만 내부적인 음용성에 대한 기준 ‘3잔을 연속으로 마실 만큼의 음용성이 있느냐?’에는 견해차이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맥주라는 주종의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는 음용성 Drinkability 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맥주라는 주종의 정체성인 캐주얼함은 좋은 음용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성도, 트위스트도, 변주도 음용성 위에 쌓아 올려져야 한다는게 저희 양조장의 생각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찐하게 맛있어도 첫 한 모금이 제일 맛있고, 두 번째 잔에서 입이 피곤해진다면 그건 저희가 추구하는 맥주가 아닙니다.)

IMG_7257.HEIC

그래서 저희가 만드는 맥주들은 모두 음용성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이번 2025 코끝에 여름은 음용성 부분에서 살짝의 의견차이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우리만 캐치하는 약간의 아쉬움일 뿐 절대 버릴 맥주는 아니다 vs 음용성이 조금 아쉽다. 아쉬움을 안고 내보내면 파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을거다.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실망하실 수도 있을거 같다. 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IMG_5439.HEIC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해 육아로 재택근무 중인 마케터까지 나와서 시음을 했다는 사실..)

사실 음식이란건 사람마다 입맛도 다르고 기준도 정말 다르기에 규격화나 수치화하기가 참 어려운 영역입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납득할만한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는건 불가능한데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만의 내부 기준을 명확하게 지켜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데에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상황에 따라, 현실에 따라 기준이 오락가락하고 유연해진다면 결국 저희 양조장과 맥주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린다는 것이니까요.

IMG_7299-ezgif.com-video-to-gif-converter.gif

결국 폐기를 결정하고 2개월 넘게 탱크에서 숙성했던 맥주를 보내주게 되었습니다. 양조장을 시작한 이래로 이정도로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던 적은 없었던 만큼.. 당장의 이익보다는 더 멀리가기 위해 한보 물러서는 느낌의 결정이었기에.. 탱크를 비우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이 뚝뚝 남았습니다😭😭😭 (중간에 밸브를 잠그고 싶었답니다..)

사실 저희가 탱크나 돈이 펑펑 남아돌아서 맥주를 폐기하는게 아닌데요.. 한철 벌어 한철 나는 저희같은 작은 양조장에게 4500잔 분량의 맥주를 버리는건 정말 큰 손해입니다. 하지만 투자를 받지 않고 양조장을 운영하는 이유도 결국 이렇게 기준에 맞지 않는 맥주를 내보내지 않을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니까요.